이성계와 청색 늑대
이성계와 청색 늑대
  • 안봉규 논설위원
  • 승인 2013.11.24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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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함께 생존하는 길은 신뢰 뿐이다

▲ 조선 태조 이성계
“낭패(狼狽)로다!”, 난감한 사태를 이르는 말이다. 이때 나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죽음을 받아드려야 하는 극단의 상황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가닥 살아날 구멍은 남아있다. 낭(狼)은 앞다리가 큰 용맹스런 이리이고, 패(狽)는 뒷다리가 큰 지혜로운 이리다. 낭과 패의 쌍대 두 마리가 하나로 뭉치면 살고, 따로 흩어지면 죽는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리떼는 협동하며 무리로서 생존할까, 아니면 곧 죽어도 각각 제 몫만 탐하다 결국 멸망의 길로 달려 갈까.

늑대는 예외도 있지만 집단으로 생활한다. 알라스카의 한대부터 중동의 열사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늑대 원조로 평가되는 몽골초원의 회색 늑대 떼는 보통 예닐곱 마리가 함께 어울린다. 주요 먹거리인 엘크의 덩치에 따라 사냥에 협력할 늑대의 숫자가 형성된 것이다. 늑대는 초원에서 유목민들을 상대로 생존경쟁을 벌렸다. 낭탐(狼貪)이란 말처럼 늑대는 제 먹이에 대하여 불가침의 치를 떤다. 특히 겨울철 밤에는 우리 안에 가둔 양까지 훔쳤고, 때로는 사람까지 죽였다. 그래서 “늑대 같은 놈”이란 표현은 공존할 수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욕이 되었지만, 정말 그럴까.

늑대 무리는 지도자 알파 부부와 그 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알파늑대는 식구를 위해 앞장서서 사냥하며, 온갖 고난을 솔선하여 견디고 외부의 위험을 막아 낸다. 또한 자녀가 회임할 만큼 성장하면 근친교배를 막기 위하여 자기 무리에서 방출하고, 이렇게 한번 외톨이 된 늑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른 무리에서 나온 외톨이와 짝을 이루어 새로운 집단을 구성하거나, 다른 집단에 투항하여 베타 지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산집합 과정은 모두 자발적이다. 어떠한 트릭도 없이 서로 온전한 신뢰를 깔고 죽음으로 협력한다. 이것이 늑대가 영물(靈物)로서 토템이 되는 이유다.

보름달 배경이면 더욱 좋겠다. 창백한 달빛에 곤두선 늑대의 은빛 털이 푸르게 물든다. 늑대는 가끔 자기 영역의 언덕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나직하나 당찬 목소리는 초원 아래로 내려 깔린다. 투명한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떠한 허세도 더러움도 끼어들 틈이 없다. 유목민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가끔 늑대를 잡았다. 반대로 저들이 죽었을 때 천장(天葬)의 형식으로 자기 몸을 늑대에게 부탁했다. 모든 유목민족들은 하늘을 “탱그리”라고 불렀다. 탱그리는 바로 하느님이다. 징기스칸(1162-1227)은 제 조상조차 “푸른 늑대”라고 믿었다. 늑대는 그에게 전쟁의 사부였다.

지난 10월 12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지난해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이 국보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여 어진봉안행렬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행사는 1688년(숙종 14)에 어진을 새로 그려 이곳에 봉안하는 행렬을 재현한 것으로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날 경기전(慶基殿)에서 문제의 어진을 직접 보았다.

곤룡포는 홍색이 상식 아닌가. 그런데 어진에 나타난 이성계(1335-1408)는 뜻밖에도 청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또 한 가지 감탄한 것은 겉옷에 가려졌지만 그의 탄탄하고 각진 몸체였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당당한 자세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그가 창업한 왕조였던 이씨 조선(1392-1910)에 대하여 항간에 떠도는 몇 가지 왈가왈부에 대하여 여기에서 간단히 정리해두고 싶다.

1. 전주이씨 조작설 – 이성계의 선조는 여진 사람이다. 즉 야만족 출신이다.

2. 벼슬 기회주의자 – 증조부 때 원 나라로 이민 갔다가 부친 때 다시 귀화했다.

3. 왕권 무력찬탈자 – 만주 고토를 취할 절호의 기회에서 역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4. 사대주의 시발자 – 명 나라에 주권을 넘겨주고 왕조 내내 소중화에 매달리게 했다.

첫째, 이성계의 조상이 여진족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여진족 만큼은 조선족 못 지 않는 위대한 민족이다. 그리고 여진은 과거 숙신의 별호였고, 숙신은 또 조선의 한 가닥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진시황도 여진족의 일파였을지 모른다.

둘째, 고려가 원 나라의 사위국가였을 때 고려는 대륙의 변방일 뿐이었다. 증조부 이안사는 요동지역 여진부락을 전담하는 “다루가치”였는데, 이것은 오히려 높이 평가할 만하다.

셋째,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이성계는 “4불(四不)”을 주장했는데, 그 행간을 뜯어보면 “타이밍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평생 불패의 장군으로서 우리는 그의 전략 감각을 중시하고 싶다.

넷째, 고려와 원 나라는 그때 수명이 다된 배터리 같은 상태였다. 조선이 신흥 명 나라와의 근린외교는 탁월한 글로벌 감각이었다. 그나마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은 이성계의 업적이라 평가 할만하다.

오늘날 한(韓)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양대 씨족은 김해김씨와 전주이씨다. 그중 전주이씨는 근세까지 왕족이었고,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전주이씨와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겠다. 따라서 외가와 처가의 족보를 들쳐봤을 때 전주이씨와 통혼하지 않은 가문은 어느 집안이든 거의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의 DNA에서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유전자형이 발견된다면, 필자는 이것을 “이성계 유전자”라고 부르고 싶다. 이 “청색 늑대 유전자”는 전주이씨 딸들을 통해서 전파된 것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밝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밝은 청색은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아우라(aura)이다. 시리우스(Sirius)는 겨울밤 북반구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로서 큰개자리 알파별이다. 청색 레이저 같은 늑대의 예리한 눈빛을 닮았다하여 천랑성(天狼星)이라고도 부른다.

시리우스는 지구에서 맨눈으로 볼 때는 단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백색 왜성을 반성(伴星)으로 거느리고 있는 쌍성계이다. 청색 늑대는 야성(野性)과 이성(理性)을 쌍성계로 거느리고 있다. 야리(野理)는 평면좌표에서 만난다. 서로 신뢰하고 보완한다. 그러면서 살아남는다. 청색은 하늘이요, 늑대 중의 알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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