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든지 아니면 바뀌든지
바꾸든지 아니면 바뀌든지
  • 안봉규 논설위원
  • 승인 2013.12.20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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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다

흰 눈이 곳곳에 덮여있고, 밤이 되면 연말연시 축제분위기가 반짝이 조명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러나 열대지방에서 후덥지근한 소나기를 맞으며 살고 있는 어린이가 이런 투명한 설경을 마음에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처음 접해보는 학술의 세계는 역시 난감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이었다. 휴식 시간에 한 학생이 가까이 다가와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근래 질문이 거의 사라진 삭막한 강의실에 소침해진 필자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속으로 환호했다. 조금 전의 강의시간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브리지(bridge)는 교량이란 뜻이지만, 윈도(Window)에 깔린 “하트게임”과 비슷한 규칙을 가진 카드놀이의 총칭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체스처럼 세계 브리지챔피언 선출대회가 열린다. 경기는 주로 2인-1조의 두 팀이 정사각형 탁자에 엇갈려(cross) 앉아 승부를 이끌어가는 게임이다. 전원회로에도 브리지가 있는데 4개의 다이오드가 마치 브리지 게임을 하듯 배치되어 있다. 제도(drawing)는 신호가 좌우상하로 진행되도록 규정되어 있어서, 회로망 그림은 바둑판 미로처럼 각이 진다. 그런데 브리지 회로는 양 팀의 대칭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름모꼴로 삐딱하게 그리는 것이 상식이다. 학생의 의문은 여기의 기하학적 위상(phase) 차이에서 불거졌던 것이다. 

이런 직감적 문제를 다루는 분야를 위상수학(Topology)이라 한다. 사람에게 직관적 통찰력은 다소 타고난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동물적인 야성과 통한다. 늑대는 “지금-여기”에 투철하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도 좋고, 미래도 좋지만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고 금언처럼 외운다. 하지만 현재 상태는 영원히 자기 품에 안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과 늑대는 그 세계가 위상적으로 다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미래의 지혜로 넘어갈 때 현재라는 순간은 그 방향만을 가리킨다. 거듭 말해서 인간은 “과거-미래 체계”를 가지며, 이때 이해득실을 따지며 움직이는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심각성은 과거의 상황이 다가올 미래와 달라졌다는데 있다. 

한국식 공부는 대체로 원리를 이해하기보다 키워드를 단답형으로 외우고, 나머지는 눈치로 얽어대는 편이다. 암기는 코앞에 닥친 시험에서 고득점을 취득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용기 있게 질문까지 했지만, 이런 유형이었다. “회로망의 배열은 직각이었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듯했다. 나는 처음에는 몇 마디 말로서 마름모의 요지를 주입시켰다. 어느 정도 센스가 있으면 이해할 줄로 믿었는데 “잘 모르겠는데요” 그는 바로 대꾸했다. 다시 교재의 해당 그림을 펴들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이번에도 그냥 “잘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일관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펜까지 잡고 그림을 그려가며 구체적으로 해설을 베풀었다. 그런대도 또 “잘 모르겠는데요.” 녹음기 틀듯 튀어나왔다. 어려서 솔직하다 하기보다 과거에 대한 믿음이 너무 화석 같이 굳은 상태였다. 

장시간을 투입해도 쉽게 풀어질 것 같이 않았다. 나는 참담했지만 일단 참았다. 그러나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고통의 대가가 따르는 인지적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려 하지 않는구나.” 이러자, 학생의 얼굴이 저항감으로 붉어졌다. “이렇게 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네는 학생으로서 자세를 다르게 바꿔야 하는 거야.” 나는 바로 정곡을 찔렀고, 그의 표정을 살핀 후에 돌아섰다. 학생은 참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일단 내 말의 뜻은 전달되는 것 같았다. 바꿈이란 자기의 과거를 부정하는 길이다. 곧 죽음과 같은 아픔이다. 지금 과거와 다른 미래가 주어졌다면 생각을 바꾸든지, 아니면 태도가 바뀌든지, 이래야 지상에서 살아남는다. 

“월인천강(月印千江)”, 달빛이 천 개의 강물에 두루 비췬다, 대강 이런 절구이리라. 지금도 더 나아진 것 없지만, 나는 천 개의 학문적 절벽 앞에서 어린 고아처럼 울부짖었다. 생명체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먼저 자기를 접는다. 그리고 두뇌와 몸을 온통 소진하며 환경에 적응할 뿐 아니라 생존하는 길이라면 DNA 변이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기부정 가운데 불법(佛法)보다 더 완벽한 논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가령 1비트의 (좌, 우) 2항 체제의 예를 든다면 “좌도 아니다, 우도 아니다, 그렇다고 좌우도 아니다, 그뿐 아니라 좌우가 아닌 것조차 아니다.” 여기까지 다다른다. 이른바 중도(中道)의 공(空)이다. 반야는 실체가 그림자처럼 비었다는 것을 가리키며 2분법 틀을 가진 언어의 아둔함을 깨운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지상명령이다. 어느 미디어는 그의 사망을 “혁신(革新, innovation)의 종말”로까지 평가했다. “혁신의 시계가 멈췄다”, 이 구절은 그때 띄웠던 머리글자다. 혁신의 한자는 외면의 변화로 여겨지지만 영어로는 “속(in)을 새롭게(nova) 하는 것(tion)”이란 내면의 변환을 뜻한다. 마음과 직관을 따라 살았던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의 아이콘이다. 스마트의 핵심 기술은 “심어놓은 칩(embedded chip)”에서 나온다. 이곳에는 저장된 데이터를 입체적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에 맞춤식으로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인체로 비유해서 “몸속의 새 마음”으로 받아드려 보자. 이제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새롭다. 

“나는 신의 생각을 알고 싶다. 나머지는 모두 사소하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과연 우주는 무엇이며, 언제 시작했고, 어떻게 프로그래밍 되어있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은 헬라어로 기록된 “예수 전(傳)”이다. 저자는 창조주의 말씀을 “로고스”라 칭했다. 로고스는 영어로 이성(理性)이다. 언어가 이성의 선물인 까닭에 신의 뜻을 “말씀”으로 번역한 것은 그럴듯하다. “태초에 비트가 있었다---” 첫 구절이 이렇게 패러디한 책이 있다. 하긴 말씀은 코드이며 코드는 비트로 구성되어 있지 않는가. 저자는 “우주 자체가 양자 컴퓨터”라고 대담한 가설까지 냈는데 타당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자연과학의 철칙이지만 우주는 지속해서 변하며 정보가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장 14절 전반)”, 이 구절은 성탄절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 비트는 예수의 몸을 빌려 사랑을 펼쳤다. 인간과 화목하기 위하여 신마저 성육(embodied) 사건으로 자신을 부정했다. 또 동거(Dwelling) 사건으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었다. 요즈음 인지심리학에서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이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마음이 “두뇌+몸+환경”으로 분산되어 있다는 관찰에서 나온 패러다임이다. 예수탄생 사건은 우주차원에서 “몸속의 마음, 마음속의 몸”으로 상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세상은 주전과 주후로 나뉘는 변환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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