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
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
  • 김동문 논설위원
  • 승인 2006.10.24 11: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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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민주화운동의 성역인가?

 
   
     
 

▶ 평화로운 시위로 마친 18일 밤 횃불 데모

암울했던 1980년 5월. 광주 인근 소도시 에서 무장 시위대와 대치 했던 9일 동안의 악몽을 기록한 빛 바랜 수첩을 정리해 본다.

필자는 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자리잡은 전남 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에서 기동취재 팀장으로 일선 시,군의 현장 기동 취재를 주로 맡고 있었다.

석간에 발행되는 신문들은 오전중 초판 제작을 끝내려고 편집국은 온통북새통이 된다. 오전 11시 30분 마감시간이 되면 일선 시, 군에서 보내온 사건 사고들을 전화로 송고 받아 기사작성, 편집부를 거쳐 초판 제작이 되기까지, 아침 편집국의 모습은 영낙없는 시골 장터의 풍경이다.

마지막 원고를 편집부로 넘기고 5층 구내식당을 들어서자 이부장의 우스게 소리가 들린다.

"전경들 1보 전진은 이쪽 테이블로"
"학생들 2보 후퇴는 저쪽 테이블로"
700원짜리 점심값 내기 즉석 게임이다,

이틀 전 16일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계엄철폐"시위 행열로 시가지 도로가 어수선하자, 기자들은 대부분 옥상에 있는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있다.

회사 5층 옥상은 도청 앞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어제 보다 두 배나 불어난 전경들이 방패와 진압봉을 앞세우고 2열 횡대로 도청 정문과 주변 담 장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시위대와 5미터쯤 간격을 두고 밀리고 밀어내는 줄다리기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옥상의 구내 식당이라 요즘은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오전 원고 마감이후 "해상왕 장보고"기획물 취재를 위해 완도 출장 길을 준비하던 차 갑자기 국장실에서 대기 지시가 떨어졌다.

계엄령 선포로 5월의 정국이 불안한 터에 서울에 이어 광주시내 대학가가 술렁이며 계엄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잇따라 편집 마감시간도 들쑥 날쑥해 취재팀들은 모두 비상 대기 상태에 놓였다.

외근 기자들이 저마다 출입처로 떠나고 내근인 편집부와. 교정부, 그리고 시군 지방을 맡고 있는 2사회부 소속 기자들이 사무실에 남아 저마다 계엄정국의 향방을 화두로 나누며 18일오후도 특별한 사고 없이 어느듯 퇴근 시간이 되었다.

18일 오후 7시께 회사 정문을 나서자 도청 앞에 정렬한 전투경찰 병력 규모가 대학생들의 도청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방패와 진압봉을 든 체 눈에 띄게 불어났고 수백 명의 시위 대학생들은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조선 대학교 방향으로 질서 정연하게 행진해 나간다.

어둠이 깔린 밤8시 조선대학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는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끝으로"계엄철폐"구호를 외친 후 해산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버스터미널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일 19일은 완도 주재기자의 요청으로 완도 항 개발에 따른 종합대책의 허구성을 취재 하기 위해 완도출장을 나서기로 한 후 밤 10시께 집으로 돌아왔다.

1980년 5월 19일 아침 8시경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류장 입구에 이르자 대합실과 광장은 빽빽이 들어선 인파와 버스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체 나주경찰서 보안과장 0경감이 전투복 차림으로 호각을 불어대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상, 하행선 버스를 전면 통제하는 바람에 정류장은 버스들로 가득 뒤엉켜 통학생과 출퇴근 공무원들의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급히 0경감 곁에 닥아서 '무슨 일이오" 묻자 그는 호루라기를 물고 광주행 버스들을 향해 진입을 차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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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2009-04-25 09:30:56
민주화운동으로 둔갑한 5.18 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