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3)
[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3)
  • 오원철 박사
  • 승인 2007.08.21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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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병기개발과 朴대통령 회담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살벌한 분위기의 1971년 朴 대통령 신년사

<국력이 약하면 나라가 기울고, 나라가 일어서려면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흥망성쇠의 기복이 무상했던 인간 역사의 산 교훈입니다.

더군다나 오늘과 같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국을 오늘의 우방으로 삼고 피와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이론을 내세우고 있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있어서는 힘없는 민족은 세계무대에서 영원히 낙오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금년은 … 우리의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련이 예상되는 해라는 점에서 실로 국운을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입니다. … 이러한 시련의 징후는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 속에서 이미 시작됐으며, 중공(中共)(註: 당시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中共, 대만을 中國이라 불렀다)은 그 영향력을 강화해 가고 있고, 소련은 전통적인 극동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미국은 아시아에서 점차 물러서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가상 적국들이 「이 지역에 힘의 진공상태가 생겼고, 공산세력이 자유진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의 입장에 올라섰다」고 그릇 판단하기 쉽게 만들고 있습니다. …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초조하게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북괴(註: 당시는 북한을 북괴라고 불렀다)가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 다시 6·25 동란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올해부터 앞으로 2, 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 이 시련의 극복을 위해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이며 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60만 국군을 더 정예화하고 250만 예비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 또한 경제건설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앞으로 민주체제와 공산체제의 대결은 전면적인 무력대결의 차원을 넘어서 번영과 복지를 앞세우는 개발경쟁에서 그 승패가 판가름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도성장을 지속시켜 나가야 하고 수출을 증대시켜 중화학공업의 육성으로 산업구조를 빠른 속도로 고도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이를 요약해 보면 우선, 朴 대통령은 1971년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시기라고 했다. 세계의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를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국력이 약하게 되면 나라가 기울게 되는 법이니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로서 국력을 기르자고 호소했다.

한반도의 정세는 어떠했던가? 우리나라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물러서려 하고 있는데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중공은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소련도 극동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무력적화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북괴가 정세를 오판한 나머지 또 다시 6·25 전쟁과 같은 참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 朴 대통령은 "앞으로 2, 3년간이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기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국가안보 대책으로서「60만 국군의 정예화」「250만 예비군의 전투력 강화」에 힘쓰겠다고 했다. 또한 민주체제와 공산체제의 대결은 무력대결의 차원을 넘어서 번영과 복지를 앞세우는 개발경쟁에서 그 승패가 판가름될 것이기 때문에 「수출의 증대」 「중화학공업의 육성」으로 경제의 성장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註: 이 시점에서의 중화학 공업이라는 것은 울산석유화학, 포항종합제철 및 4대 핵공장 건설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朴 대통령의 국가운영 지침은, 「수출」,「석유 화학 및 종합 제철 공장 건설」,「국군 및 예비군의 장비 현대화」,「방위산업 육성」등 4개 항목이라는 결론이 된다. 71년의 신년사가 왜 이런 모양이 됐을까? 그 이유를 추론해 본다.

주한미군 감군에 관한 朴 대통령과 애그뉴 美 부통령의 회담

1970년 7월 6일 닉슨 행정부가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통고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그 후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회의가 한미간에 계속 됐는데, 그 결과가 朴 대통령에게는 몹시 못마땅했다.

주한 美 7사단의 감군 문제에 대한 협의차 애그뉴 부통령이 내한한다는 보고를 받은 朴 대통령은, 애그뉴 부통령과의 회의가 우리나라 안보상 지극히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의 회고록(註: 『한국경제정책 30년사』, pp.317∼318 참조)에 의하면 "朴 대통령은 회담하기에 앞서 약 2주일 동안 대책 구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거의 모든 일정을 미루고 사색하고 메모하고, 사색하고는 메모를 수정하는 데 몰두하였다.

朴 대통령과 애그뉴 부통령의 제1차 회담은 8월 25일 오전 10시 최규하 외무부장관, 포터 주한 美 대사, 그리고 金 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당초 회담은 두시간 예정이었으나 쌍방간의 진지한 토론, 특히 朴 대통령의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이론 정연하고 탁월한 전략에 입각한 설득 노력으로 6시간이나 걸렸다. 얼마나 회담이 진지하고 심각했든지 점심을 할 겨를이 없었을 뿐 아니라 화장실에 가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제1차 회담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겨우 커피와 케이크로 점심을 때웠다. 2차 회담은 다음날 아침 8시 30분부터 청와대 조찬형식으로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졌다"고 한다. 朴 대통령 자신도 "이번에 주한미군의 일부 감축과 국군 현대화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명시된 국가보위의 중대임무를 완수함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註: 71년 2월 8일 주한미군 일부 감축과 관련, 한국안보에 관한 한미간 협의가 종결된 데 따른 특별담화 중에서)고 언명할 정도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면서 감군 정책은 중지하는 것이 옳다고 애그뉴 부통령을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첫째, 한반도는 53년이래 휴전상태에 있는데, 북한은 휴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 무력통일을 위하여 간단없이 무력도발 침략을 계속하고 있어 준전시상태에 놓여 있다.

둘째, 북한은 68년의 무장특공대에 의한 청와대 습격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00여 명의 무장공비가 1개월 이상 준동한 울진·삼척지구 침투사건, 69년의 美 공군 EC121기 격추사건, 70년 우리 해군 방송선 납북사건과 3부 요인 암살을 기도한 현충문 폭파사건 등 근래에 들어와 한미 양국에 정면으로 무력도발하고 있다. 그 외에 70년 한 해만 예를 들어도 4월의 격열비열도 간첩사건, 6월의 군자만 간첩선 나포사건 및 동해안 간첩선 격침사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력침투를 강화하고 있다.

셋째, 주한미군의 감축은 북한의 무력도발 억제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 재개의 오판을 유발할 염려가 지대하다.

넷째,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유지는 한국의 안보는 물론 동북아시아, 특히 일본의 안보에 직결되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유지상 극히 긴요하다. 70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월남을 제외하고는 공산세력으로부터 무력도발을 간단없이 받고 있는 준전시상황 하에 있는 지역은 한국밖에 없다.

이러한 朴 대통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美 7사단의 철군 방침은 확고부동했다. 결국 이틀 동안의 회담에서 양측은 앞으로 「한국의 안전보장문제 협의」와 「미군 감축문제 협의」를 동시에 논의해 나가기로 합의하고 (1) 장비현대화, (2) 장기군사원조, (3) 2만명 이상 감군은 않겠다는 美측의 보장 등 구체적인 문제는 앞으로 있을 고위외교 및 군사회담에서 계속 협의하기로 하고 회담을 끝냈다.

미국,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밝혀

그런데 회담이 끝나자마자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애그뉴 부통령은 朴 대통령과의 2차에 걸친 회담에서 "美 7사단만 철수하고 2사단은 계속 주둔해서 한국안보에 임하게 되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에는 절대 염려가 없다. 또 2만 명 이상의 감군은 없다"라고 확약을 했는데, 이 날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미국기자와의 회견에서 엉뚱한 발언을 했다.

"한국이 장기 계획적으로 군의 근대화를 완수, 미군의 지원 없이도 안전보장을 유지하자면 앞으로 5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 때가 되면 주한미군이 완전 철수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미군의 장기 철수계획 구상은 朴 대통령도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애그뉴 부통령의 발언 요지는 "한국 정부의 의사 여하에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제7사단뿐만 아니라 앞으로 약 5년 후에는 완전 철수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한미간에는 현격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한국측은 한국군을 월남에 파병할 때, 존슨 행정부와 "주한미군을 철수할 경우에는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를 하는 데 동의한다"고 합의를 했는데, 한미간에 해석이 달랐다.

한국측은 주한미군 철수 때에는 사전에 한국측과 협의 결정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철수는 한국측의 동의가 필요 없다.다만 철군을 하기 위한 절차 등에 대해서만 사전 협의한다"는 입장인 것이다(註: 미국은 70년 2월 24일에 개최됐던 美 상원 「사이민톤 위원회」의 「한국문제 비밀 의사록」을 70년 9월 12일 발표했는데, 이 의사록을 보면 포터 주한대사는 "미국은 한국군의 월남파병 및 기타사항과 연관해서 주한미군의 규모 및 주둔시기에 관해서 아무런 언질도 준 적이 없다. 다만 주한미군 병력을 대폭 삭감할 경우에는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하는 데 동의한다"고 증언했다. 즉 미국측 입장을 두둔하는 증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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